정상윤 블래쉬자산운용 대표의 사무실 한켠엔 수백여 장을 모아놓은 명함 꾸러미가 있다. 네트워크를 중시하는 스타일이 대번 드러났지만 정 대표의 답변은 짐작을 뛰어넘었다. "올해 처음 만나 뵌 분의 명함만 추려놓은 겁니다."
정 대표는 기업 탐방 전문가다. 스몰캡(small capital)에서 투자 전제인 미스 프라이싱(mis-pricing)의 실마리를 찾는 건 결국 탐방이란 확신을 갖고 있다. 대형주는 기관뿐 아니라 개인 투자자까지 방대한 정보에 접근할 수 있다. 하지만 스몰캡에서는 아직 속속들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기업이 적지 않다. 이들 투자처의 시장가격과 내재가치의 이격을 확인하는 게 바로 탐방이다.
탐방에 대한 확고한 신념은 뚜렷한 성과로 입증되고 있다. 블래쉬운용은 가장 '핫'한 전문 사모(헤지펀드) 운용사로 부상했다. 지난해 초 라이선스를 취득한 신생사이지만 올해 상반기 에쿼티 헤지 전략에서 수익률 1위를 기록했고 단번에 실적 상위사로 도약했다. ◇성장 스토리 : 투자 매료, 부자로 나아가는 창구…최연소 투자자문사 대표
정상윤 대표(사진)는 고려대학교에서 경제학을 공부할 때부터 주식을 거래해 왔다. 주식에 매료된 건 부자로 거듭날 수 있는 창구였기 때문이라고 덤덤하게 말한다. 펀드매니저마다 투자 입문의 소회로 장광설을 내놓는 것과 사뭇 달랐다.
자기 시간을 투입해 그 대가로 월급을 받는 직종은 큰 돈을 모으기 쉽지 않다. 봉급만으로는 자산가가 되기 어렵고 의사, 변호사 등 선망 직업 역시 마찬가지다. 거부는 자기 자산이 돈을 벌도록 해야 한다는 게 그의 판단이었다. 이 지점에서 주식과 투자를 직업으로 삼기로 결론을 내렸다.
졸업 후 여의도에 입성해 증권사와 투자자문사를 잠시 거쳤고 아이포스투자자문에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쌓았다. 정 대표가 주니어 운용역이었던 10여 년 전 만해도 웬만한 자문사는 연봉이 많지 않았다. 그 와중에 무거운 스트레스를 짊어져야 했다. 당시 동기로 입사한 인력은 하나둘씩 퇴사를 선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 대표는 특유의 인내력과 꾸준함으로 오히려 오너와 신뢰를 다져갔다. 그 결과 2017년 34살 나이에 국내 최연소로 투자자문사 대표에 오르는 결실을 맛봤다. 그 뒤 블래쉬운용의 오너이자 수장(각자 대표 체제)인 백지윤 대표와 인연을 계기로 하우스를 옮겼다. 블래쉬투자자문 시절부터 운용사로 거듭난 현재까지 대표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정 대표가 내세우는 탐방은 무엇보다 뚝심이 필수다. 기관 투자자에 친밀한 IR 담당자도 있지만 대형 증권사가 아니면 안색을 바꾸는 이도 허다하다. 그럼에도 사기가 꺾이는 대신 발로 뛰며 밀어부치는 끈기가 필요하다. 이런 측면에서 정 대표는 스스로 최적화된 투자 전략으로 승부를 걸고 있다.
◇투자 스타일 및 철학 : 스몰캡과 탐방 '두 키워드'…프라이싱 에러 간파
정상윤 대표의 투자 스타일은 '스몰캡'과 '탐방' 두 키워드로 요약된다. 미지의 종목에 투자의 기회가 있고 직접 발로 뛰어 답을 찾는다는 철학이 뚜렷하다.
스몰캡에 목매는 건 시장이 프라이싱에 실패한 기업이 있을 확률이 훨씬 높기 때문이다. 대형주를 둘러싼 정보는 매시간 쏟아져 나오고 있다. 방대한 정보가 노출돼 있기에 나홀로 숨겨진 가치를 찾는 게 불가능하다. 정 대표는 모두가 자기 패를 공개하고 화투를 치는 것과 다르지 않다고 말한다.
하지만 스몰캡은 전혀 다른 시장이다. 전문 애널리스트는 줄어드는 추세이지만 매년 증시에 데뷔하는 코스닥사가 줄을 잇고 있다. 주식 투자와 분석이 직업인 전문가 간에도 모르는 기업이 많고 비즈니스를 오해하는 사례가 수두룩하다. 결과적으로 주가가 제값을 부여 받지 못한 경우가 더 많을 수밖에 없다.
여기서 미스 프라이싱을 확인하는 해법이 바로 탐방이다. 우선 기업의 청사진과 경영진의 경영 계획을 정확히 확인한다. 최근 투자를 단행했으면 재원 투입의 배경과 실적으로 연결되는 시점도 문의한다. 과거 재무제표로 얻을 수 없는 미래 방향성과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 이벤트를 재점검한다.
더 중요한 건 시장의 오해를 제대로 진단하는 작업이다. 애널리스트도 결국 사람이어서 반복된 재료에 노출되면 특정 기업에 선입견을 가질 수 있다. 아예 직접적으로 잘못된 소문 탓에 곤혹을 겪는 업체도 있다. 여의도 주류 집단의 고정 관념에서 벗어나 오해를 정확히 파악하고 단초를 확인하는 게 탐방으로 거두는 실익이다.
씨에스윈드의 경우 수년 전까지 실적 성장에 한계(연간 매출액 3000억원, 영업이익 300억원)가 있는 기업으로 인식돼 왔다. 상장 후 해상풍력 시행착오로 대규모 적자를 기록한 터라 신뢰를 잃기도 했다. 미국이 자국 풍력타워 시장을 보호하고자 주요 국가의 기업을 덤핑 혐의로 제소하는 악재도 불거졌다.
하지만 탐방 끝에 씨에스윈드는 말레이시아 법인을 통해 미국 수출이 가능하다는 게 파악됐다. 반덤핑 이슈로 미국 내 공급이 줄면 풍력타워의 가격은 상승한다. 미국의 덤핑 혐의 제소가 오히려 실리를 챙길 수 있는 기회였던 셈이다. 정 대표는 대규모 투자 차익을 거두는 기회를 거머쥐었다.
◇트랙레코드1 : 블래쉬 멀티전략 전문사모투자신탁 1호 '에쿼티 헤지 1위'
올들어 블래쉬운용은 헤지펀드 시장에서 입소문을 탔다. 상반기 헤지펀드(증권사 PBS 계약 펀드 기준) 성과를 집계한 결과 '블래쉬 멀티전략 전문사모투자신탁 1호(270억원)'가 에쿼티 헤지 전략에서 수익률 1위(연초 이후 27%)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이 전략은 최상위 하우스인 타임폴리오자산운용의 텃밭이다. 하지만 'The Time' 시리즈를 모두 제치는 성과를 냈다. 에쿼티 헤지 전략의 경우 롱숏(long/short)을 구사하는 운용 전략상 '깜짝 선두'가 나오기 쉽지 않다. 일회성 대박이 터지는 롱바이어스드 펀드와는 결이 다르다. 숏 포지션으로 헤지에 나서는 만큼 운용 성과가 중장기적으로 유지된다.
블래쉬 멀티전략 1호는 정 대표의 스타일답게 스몰캡 우량주가 타깃이다. 이들 종목을 대상으로 롱 포지션을 설정한 뒤 거의 비슷한 비중으로 선물 지수의 숏 포지션을 취한다. 롱숏의 자산 비중을 1대 1 수준으로 설정해 변동성을 크게 낮췄다. 침체 구간에서는 숏 비중을 50~70% 줄이고 과열 구간에서는 20~30% 늘리기도 한다.
숏 포지션에서는 특정 종목의 공매도에 나서지 않는다. 시장 리스크의 방어 차원에서 선물 지수만 헤지로 활용한다. 오로지 '스몰캡+탐방'에만 집중하고자 시장 리스크를 없애는 포지션을 취했을 뿐이다. 변동성이 강화된 만큼 복리의 마법으로 추가 수익까지 기대할 수 있다.
정상윤 대표는 "블래쉬운용이 내놓은 코스닥벤처펀드의 경우 수익률이 300%에 달하기도 한다"며 "다른 운용사는 공모주 수익이 핵심이고 나머지 유니버스는 우선배정 요건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삼는다"고 말했다. 이어 "하지만 블래쉬운용은 나머지 유니버스의 스몰캡 투자가 메인 전략이고 공모주 수익을 플러스 알파로 여기고 있다"고 덧붙였다.
◇트랙레코드2 : 파크시스템스 투자…시총 500억 대서 8000억까지
블래쉬운용을 이끌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투자처는 파크시스템스다. 지난해 초 코로나19 사태로 시장이 패닉에 빠졌을 때 본격적으로 투자를 시작했다. 당시 시가총액이 500억원 수준이었으나 현재 8000억원을 넘나들고 있다. 지난 4월말을 전후해 시총이 1조원 수준으로 치솟기도 했다. 한때 9% 수준의 지분 보유 공시를 할 정도로 투자 금액도 컸다.
본래 정상윤 대표가 상장 초기부터 주시해 왔던 업체다. 원자현미경을 생산하는 기업인데 매출총이익률(GPM) 65%에 매년 30% 정도 성장을 이어왔다. 반도체가 나노 단위로 미세화되면서 정확하게 계측하려면 원자현미경이 필수다. 하지만 오랜 기간 시장에서 소외를 받아왔다.
무엇보다 매년 매출 볼륨이 커져도 좀처럼 수익성이 개선되지 않았다. 이익을 날 때마다 연구개발비를 확대하고 해외 영업 인력을 충원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 대표는 산업용 원자현미경 시장의 진입 장벽이 매우 높은데다 경쟁사인 미국 브루커(bruker)가 위축 일로를 걷는 데 주목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파크시스템스는 브루커와 맞붙은 계약 경쟁에서 웬만하면 지지 않았다. 브루커의 기술력은 도태되는 상황이었고 파크시스템스의 충원 인력도 브루커 등 경쟁사에서 이직한 인사들이었다. 이 와중에 원자현미경의 전방 산업은 반도체에서 디스플레이 등으로 급격히 확대됐다.
역시 탐방을 통해 얻은 소득은 값졌다. 본래 브루커는 원자현미경을 자체 개발한 게 아니라 비코를 인수해 기술을 확보했었다. 비코 역시 써모 마이크로스코프를 사들여 핵심 기술을 취득했다. 써모 마이크로스코프의 경우 파크 사이언티픽 인스트루먼트와 토모메트릭스가 합병된 기업이다. 그런데 현재 파크시스템스의 대표가 바로 파크 사이언티픽 인스트루먼트의 최고경영자(CEO)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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